시 한수

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

bassdrum 2022. 9. 29. 05:47

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

가능하다면 꽃밭이 있고

가까운 거리에 숲이 있으면 좋겠어

개울 물 소리 졸졸거리면 더 좋을 거야

잠 없는 나 당신 간지럽혀 깨워

아직 안개 걷히지 않은 아침 길

풀섶에 달린 이슬 담을 병 들고 산책해야지

삐걱거리는 허리 주욱 펴 보이며

내가 당신 “하나 두울~”

체조시킬 거야

 

햇살이 조금 퍼지기 시작하겠지

우리의 가는 머리카락이 은빛으로 반짝일 때

나는 당신의 이마에 오래 입맞춤하고 싶어

사람들이 봐도 하나도 부끄럽지 않아

 

아주 부드러운 죽으로

우리의 아침 식사를 준비할 거야

이를테면 쇠고기 꼭꼭 다져넣고

파릇한 야채 띄워 야채죽으로 하지

깔깔한 입 안이 솜사탕 문 듯 할 거야

이 때 나직히 모짜르트를 울려 놓아야지

 

아주 연한 헤이즐럿을 내리고

꽃무늬 박힌 찻잔 두 개에 가득 담아

이제 잉크 냄새 나는 신문을 볼 거야

코에 걸린 안경 너머 당신의 눈빛을 읽겠지

눈을 감고 다가가야지

서툴지 않게 당신 코와 맞닿을 수 있어

강아지처럼 부벼 볼 거야

그래 보고 싶었거든

 

해가 높이 오르고

창 깊숙이 들던 햇빛 물러 설 즈음

당신의 무릎을 베고

오래오래 낮잠도 자야지

아이처럼 자장가도 부탁해 볼까

 

어쩌면 그 때는

창 밖의 많은 것들

세상의 분주한 것들

우리를 닮아 아주 조용하고

아주 평화로울 거야

 

나 늙으면 당신과 살아보고 싶어

당신의 굽은 등에 기대 울어보고 싶어

장작불 같던 가슴

그 불씨 사그러들게 하느라 참 힘들었노라

이별이 무서워 사랑한다 말하지 못했노라

사랑하기 너무 벅찬 그 때

나 왜 그렇게 어리석었을까 말할 거야

 

겨울엔

백화점에 가서

당신의 넓은 가슴 덥힐 스웨터를 살 거야

잿빛 모자 두 개 사서 하나씩 쓰고

강변 찻집으로 나가 볼 거야

눈이 내릴까…

 

봄엔

당신 연베이지빛 점퍼 입고

나 목에 겨자빛 실크 스카프 매고

이른 아침 조조 영화를 보러갈까

'드라이빙 미스 데이지' 같은…

 

가을엔

은빛 머리 곱게 빗어 넘기고

헤이즐럿 보온병에 담아 들고

낙엽 밟으러 가야지

저 벤치에 앉아

사진 한 번 찍을까

곱게 판넬하여 창가에 걸어두어야지

그리고 그리곤

당신 좋아하는 서점에 들려

책 한아름 사서

서재로 가는 거야

난 당신 책 읽는 모습 보며

화폭 속에 내 가슴 속에

당신의 모습 담아

영원히 영원히 간직할 거야

나 늙으면 그렇게 당신과 함께 살아보고 싶어…

글 황정순 시인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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